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19-22)


 

사람에게 있어 근심과 기쁨은 상반대지만, 원함은 기쁨이고, 근심을 원하는 사람은 아부도 없을 것이다. 항상 함께 했던 예수께서 떠날 것을 말씀 했을 때에 제자들은 근심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요 16: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조금 있으면”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육신의 예수는 다시 보지 못함이고, “또 조금 있으면”은 진리의 성령이신 또 다른 보혜사로 다시 오실 것을 요14;16의 말씀과 같이 약속하신 것이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제자들로서는 육신의 이별을 곡하고 애통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고서는 영혼이 다시 사는 길이 없기 때문에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죽어 주시고 다시 사셔서 첫 열매인 십자가의 도를 이루어 주심으로 이를 믿는 자마다 영생 구원을 받게 됨으로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는 것이다.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중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 수술 전에는 근심하지만, 수술이 잘되어 끝난 후에는 기쁨이 된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근심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기쁨에 아픔과 고통의 근심에서 해방을 받게 됨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계집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의 종의 상징이고, 약속으로 말미암는 이삭은 진리의 종의 상징이다. 아브라함의 씨는 약속으로 말미암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씨가 될 것을 사라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계집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좇으라”고 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심히 근심했다고 했다.(창 21:9-13)


아브라함의 근심은 두 아들 다 자신의 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육체로 말미암는 계집종 곧 율법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이기 때문에 내어 좇으라는 것이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다.(갈 4:23-24 두 언약의 비밀)(갈4:30)


우리 모든 사람은 육체 로 말미암는 율법 아래서 태어나고, 예수를 믿어 거듭나서 영생에 이르러야 하는데, 먼저 할 것은 내 마음에 새긴 율법 곧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눅9:23)


자신을 버려야 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근심이 되지만, 믿음으로 버리고 약속하신 보혜사께서 함께 하실 때에는 더 큰 기쁨으로 변화를 받게 됨이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가신 길은 우리들이 본받아 따라 가야할 길이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한 근심(나를 버려야하는 근심)이 없는 자는 기쁨도 없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 있어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할 진리의 성령 보혜사와 영혼의 새로운 천국을 약속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