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는 회복의 역사가 아니라 덧입는 역사

 

         덧입는 역사(고후5:1-5)

 

교리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건설하시고 에덴의 주인공을 창조하심은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체로 처음에는 창조되었는데, 첫 사람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원죄를 지었고, 그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는 죄인이고, 죄인 된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아담의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영생체로 회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회복을 말하지 않고 거듭나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요(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거듭난다는 뜻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함이 아니다. 우리들이 거듭나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심령 곧 율법의 인격에서 진리의 인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선 거듭난다는 의미를 보면, 우리의 근본적인 인격인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격 위에 거듭 거듭 진리의 말씀으로 덧입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율법의 말씀의 인격이 진리의 말씀의 능력에 삼킨바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이 세상을 끝맺기까지 율법의 근본적인 인격은 있으나, 진리의 말씀 곧 십자가의 도를 믿고 은혜를 입어---본 받아 순종함으로, 자신의 육의 소욕을 좇아 살지 않는 것 뿐이다.

 이는 율법의 말씀 위에 진리의 말씀으로 덧입어, 율법에서 비롯되는 육의 소욕을 죽이면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러라"

 진리의 말씀 안에 있다하여 율법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완전케 세우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무거운 짐이요, 이 요구를 이루어 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오직 예수님 만이 이 요구를 이루어줄 수 있는 전능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바로 이 능력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이루어 주신 십자가의 도이다. 율법 안에서 곧 세상의 것으로 무거운 짐진 자들의 탄식이 십자가의 도안에서 끝나게 된다. 육신적인 물질적인 탄식은 자신의 율법의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탐심에서 비롯되는바, 십자가의 도를 본 받는 믿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탄식과 원망과 불평이 그치게 된다.

 자신을 부인하는 결단은 모든 인생을 포기하는 것 같으나, 이는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는 종과 아들의 차이와도 같은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정죄 와 사망의 능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만, 진리 안에서는 자신을 포기하고 오직 십자가의 도 앞에 자신을 드리는 오직 예수님 만을 따르는데 있다.

 근본적으로 교리에서 회복의 주장은 천사창조와 죄의 기원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한 죄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첫 사람 아담에게 불순종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체로 선하게 첫 사람 아담을 본래 지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성경의 말씀은 본래 죄의 종으로(롬6;17) 그리고 본잘상 진노의 자녀로(엡2:3) 지음을 받았다고 증거하지 않는가?

 죄와 진노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는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다.(롬4:15)(고전15:46)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본래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진노의 자녀이고, 죄의 종이다. 진리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믿음에서 진리의 믿음으로 다시 거듭 나자. 5절)믿는 자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원(ㅇ)의 회복이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덧입는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