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사(生老病死)(창3:17-19)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은 축복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한 생명은 주먹을 불끈쥐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을 맞는다.

순수하고 순결한 한 생명은 세상을 맞는 순간 어떠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나날을 염려 걱정해서 울음부터 나오는 것은 아닐런지? 세상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두려운 힘에 떨고 있지는 않는가?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 보니 차라리 엄마의 품속이 더욱 그리운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모르고 부모는 즐거워하니, 그 아이는 세상에 태어 나면서 부터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나 한 생명의 탄생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어나고, 부모의 인도와 보호로 자라서 세상 학문을 터득하고, 태어날 때의 주먹을 불끈쥐었던 것처럼 무언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게 되고--고통의 나날은 이어진다.

고통의 날들 속에서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는 소망이 없는 삶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사는 자요, 두려움과 고통의 삶에 양심이 마비된 자의 넋두리는 아닐런지?

우리들에게 시간은 기다려 주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를 않는다. 지금 이순간에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마지막 심판의 역사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예수 안에서 천국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없는 자는 세상의 것으로 한 자리 잡으려고 세상에 미쳐 있을 것이고, 확고한 소망의 믿음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것(십자가의 도)에 미쳐야 할 것이다.

"인생은 짧다" 함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生)! 살아 있음은 축복이요 기쁨이다. 그러나 살아 있음이 괴로움과 고통이 됨은 영혼의 안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에 따른 삶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잠간 동안의 이 세상에 속한 삶에 영혼도 육체도 늙고, 그 결과 육의 소욕을 이루기 보다도, 오히려 탄식의 소리가 높아감을 우리들은 본다.

이는 그 중심의 사상이 땅의 것으로 가득차서 그 욕심이 끝이 없고, 몸은 늙고 쇠하여지므로 이루지 못함에 대한 탄식이다. 세상의 것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늙고 병들고 죽음이 가까이 올 때에 세상의 것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것 곧 십자가의 도 말씀으로 중심의 사상을 삼고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마음을 갖자! 그럴 때 만이 인생의 네 가지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인생들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죄 가운데서의 해방 곧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이 성육신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도 곧 보혈의 공로를 이루시고, 우리들에게 알게 하시고--깨닫게 하시며--믿게 하여 약속하신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를 마음 가운데 영접하여, 땅에 것으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인생들을 괴롭게 하는 고통과 억압과 두려움 가운데서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고, 이제는 진리의 성령 보혜사로 오심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라!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고 병마를 주는 사망의 세력이 사단의 세력이요, 예수님께서 밝혀 주신 세상 임금을 통한 역사이다.(요12:31)(고후4:4) 이는 세상을 통치하는 첫 사람 아담이고 아담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 모든 인생들이 갇혀 있어서, 그 안에서 괴로움과 고통을 격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한 번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영원히 사는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알고 믿는 믿음으로, 생노병사의 고통 가운데서 벗어나자!

모태로부터 이 땅에 태어날 때(生)는 눈물로 시작 했지만, 육체의 죽음(死)이 올 때에는 천국의 소망 가운데서 기쁨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자가 되자.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마음을 갖자!

십자가의 도 안에서, 생노병사의 고통 가운데서 벗어나자